時事/経済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 1937)**은 인류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난징 대학살의 실체 (역사적 사실)


           

1937년 12월,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후 약 6주 동안 민간인과 무장 해제된 군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대규모 학살과                폭행 사건입니다.


  • 학살 규모: 중국 정부와 역사학계는 희생자 수를 약 3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최소 15만 명에서 20만 명 이상으로 기록함)

  • 잔혹 행위: 단순 총살뿐만 아니라 생매장, 참수, 방화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성범죄와 영유아 살해 등 인륜을 저버린 범죄가 기록과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증거 자료: 당시 난징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와 기자들이 남긴 일기(예: 존 라베의 일기), 일본군 종군 기자의 기록, 사진 증거, 그리고 생존자들의 증언이 명백히 존재합니다.



    2. “살인 시합”과 잔혹한 처형 방식


    당시 일본군 내에서는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사람을 죽이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살인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 100인 참수 경쟁: 무카이와 노다라는 두 소위가 누가 먼저 일본도로 100명을 베는지 시합을 했고, 이 내용은 당시 일본 신문에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보도되었습니다.

    • 살해 방법의 잔혹성: 총알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넣고 묻어버리는 생매장, 총검술 연습 도구로 산 사람을 사용하는 행위,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는 행위 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3. 대규모 성범죄와 여성 유린 (난징의 강간)


    이 사건을 서구권에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이라고 부를 정도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극에 달했습니다.

    • 대상 불문: 80대 노인부터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렀습니다.

    • 집단 유린과 살해: 군인들은 여성을 집단으로 유린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잔인하게 신체를 훼손하거나 살해했습니다. 당시 난징에서 발생한 성범죄 피해는 최소 2만 건에서 8만 건 사이로 추산됩니다.


    4. 항복한 포로들의 집단 학살


    일본군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기력하게 항복한 중국군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습니다.

    • 양쯔강의 비극: 포로들의 손을 묶어 양쯔강 변으로 끌고 간 뒤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했습니다. 강물은 시신으로 뒤덮여 흐르지 못할 정도였고, 강물 전체가 붉게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 민간인과의 혼재: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군인처럼 보이면(손에 굳은살이 있거나 머리가 짧으면) 즉석에서 처형했습니다.


    5. 증거 인멸과 은폐 시도



    일본군은 자신들의 만행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 시신 소각: 엄청난 수의 시신을 태워 재로 만들거나 강에 던져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 검열: 당시 난징에 있던 외국 기자들의 필름을 압수하고 통신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필름을 빼돌린 기자들과 선교사들의 기록(존 라베, 미니 보트린 등) 덕분에 이 끔찍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 일명 도쿄재판)에서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수를 “20만 명 이상”으로 공식 기록한 근거와 소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식 소스: 도쿄재판 판결문 (The IMTFE Judgment)



    1948년 11월에 발표된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 제27장 “전쟁 범죄(War Crimes)” 파트 중 “난징 폭행(The Rape of Nanking)” 섹션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판결문 인용: “일본군이 점령한 후 처음 6주 동안, 난징과 그 주변에서 살해된 민간인과 포로의 총수는 2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에는 일본군이 시신을 소각하거나 양쯔강에 던져 증거를 인멸한 사례는 포함되지 않았다.”



    2. 구체적인 수치의 근거 자료


    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 수치를 도출했습니다.


    ① 매장 기록 (Burial Records)

    가장 결정적인 물적 증거였습니다.

    • 홍만자회(Red Swastika Society): 난징의 인도주의 단체로, 학살 직후 시신 155,337구를 수습하여 매장했다고 보고했습니다.

    • 숭선당(Chongshantang): 또 다른 자선 단체로, 약 112,266구의 시신을 매장한 기록을 제출했습니다.

    • 재판부는 이 기록들의 중복 가능성을 검토한 후에도 최소 15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② 목격자 증언 및 자료

    • 존 라베(John Rabe)의 일기: 당시 난징 안전구역 위원장이었던 독일인 존 라베와 미국인 선교사들이 기록한 일기와 보고서.

    • 일본군 측 자료: 일본군 제16사단 등 당시 난징 점령에 참여했던 부대들의 진중일기(전투 일지)와 포로 처형 기록.



    3. 다른 재판(난징 전범 재판)과의 차이

    참고로, 도쿄재판과는 별개로 중국 현지에서 열린 **”난징 전범 재판(1947)”**에서는 더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 30만 명 이상이라는 수치가 제시되었습니다.

    • 도쿄재판(국제): 보수적으로 추산하여 20만 명 이상으로 확정.

    • 난징재판(중국): 확인된 매장 기록과 생존자 조사를 합산하여 30만 명 이상으로 확정.


    —————————————————————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가 벌인 이 참혹한 “100인 참수 경쟁”은 당시 일본의 유력 일간지였던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현 마이니치신문의 전신)에 아주 상세하게 보도되었습니다.



    1. 핵심 소스: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


    당시 신문은 이들의 살인 시합을 총 4차례에 걸쳐 연재하듯 보도했습니다.


    • 1차 보도 (1937년 11월 30일): “백인 참수 “레코드” 달성”이라는 제목으로 두 소위가 난징으로 향하는 도중 참수 시합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 최종 보도 (1937년 12월 13일): **”백인 참수 “초기록(超記録)”“**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입니다.

      • 내용: 난징 입성 직전, 무카이는 106명, 노다는 105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 100명을 넘었는지 알 수 없어, 두 소위는 “그럼 150명 베기로 다시 시합하자”며 웃으며 합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사진: 두 소위가 일본도를 짚고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현재 난징 대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 사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제2의 소스: 전후 재판 기록 및 본인 진술


    이 기사는 단순히 신문사의 과장이 아니었음이 전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 노다 츠요시의 자백: 전쟁 중 고향으로 돌아간 노다 소위는 초등학교 강연 등에서 **”실제로 내가 베어보니 100명은커녕 별로 죽이지도 못했다. 대부분 투항한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 시합이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음을 본인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 난징 전범 재판 (1947년): 전후 두 사람은 이 신문 기사를 근거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재판에서 “신문사가 멋대로 지어낸 기사”라고 변명했지만, 당시 기사를 썼던 종군 기자들의 증언과 기사의 구체성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 1937)**은 인류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난징 대학살의 실체 (역사적 사실)


           

1937년 12월,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후 약 6주 동안 민간인과 무장 해제된 군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대규모 학살과                폭행 사건입니다.


  • 학살 규모: 중국 정부와 역사학계는 희생자 수를 약 3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최소 15만 명에서 20만 명 이상으로 기록함)

  • 잔혹 행위: 단순 총살뿐만 아니라 생매장, 참수, 방화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성범죄와 영유아 살해 등 인륜을 저버린 범죄가 기록과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증거 자료: 당시 난징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와 기자들이 남긴 일기(예: 존 라베의 일기), 일본군 종군 기자의 기록, 사진 증거, 그리고 생존자들의 증언이 명백히 존재합니다.



    2. "살인 시합"과 잔혹한 처형 방식


    당시 일본군 내에서는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사람을 죽이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살인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 100인 참수 경쟁: 무카이와 노다라는 두 소위가 누가 먼저 일본도로 100명을 베는지 시합을 했고, 이 내용은 당시 일본 신문에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보도되었습니다.

    • 살해 방법의 잔혹성: 총알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넣고 묻어버리는 생매장, 총검술 연습 도구로 산 사람을 사용하는 행위,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는 행위 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3. 대규모 성범죄와 여성 유린 (난징의 강간)


    이 사건을 서구권에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이라고 부를 정도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극에 달했습니다.

    • 대상 불문: 80대 노인부터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렀습니다.

    • 집단 유린과 살해: 군인들은 여성을 집단으로 유린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잔인하게 신체를 훼손하거나 살해했습니다. 당시 난징에서 발생한 성범죄 피해는 최소 2만 건에서 8만 건 사이로 추산됩니다.


    4. 항복한 포로들의 집단 학살


    일본군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기력하게 항복한 중국군 포로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습니다.

    • 양쯔강의 비극: 포로들의 손을 묶어 양쯔강 변으로 끌고 간 뒤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했습니다. 강물은 시신으로 뒤덮여 흐르지 못할 정도였고, 강물 전체가 붉게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 민간인과의 혼재: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군인처럼 보이면(손에 굳은살이 있거나 머리가 짧으면) 즉석에서 처형했습니다.


    5. 증거 인멸과 은폐 시도



    일본군은 자신들의 만행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 시신 소각: 엄청난 수의 시신을 태워 재로 만들거나 강에 던져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 검열: 당시 난징에 있던 외국 기자들의 필름을 압수하고 통신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필름을 빼돌린 기자들과 선교사들의 기록(존 라베, 미니 보트린 등) 덕분에 이 끔찍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 일명 도쿄재판)에서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수를 "20만 명 이상"으로 공식 기록한 근거와 소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식 소스: 도쿄재판 판결문 (The IMTFE Judgment)



    1948년 11월에 발표된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문 제27장 "전쟁 범죄(War Crimes)" 파트 중 "난징 폭행(The Rape of Nanking)" 섹션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판결문 인용: "일본군이 점령한 후 처음 6주 동안, 난징과 그 주변에서 살해된 민간인과 포로의 총수는 2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에는 일본군이 시신을 소각하거나 양쯔강에 던져 증거를 인멸한 사례는 포함되지 않았다."



    2. 구체적인 수치의 근거 자료


    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 수치를 도출했습니다.


    ① 매장 기록 (Burial Records)

    가장 결정적인 물적 증거였습니다.

    • 홍만자회(Red Swastika Society): 난징의 인도주의 단체로, 학살 직후 시신 155,337구를 수습하여 매장했다고 보고했습니다.

    • 숭선당(Chongshantang): 또 다른 자선 단체로, 약 112,266구의 시신을 매장한 기록을 제출했습니다.

    • 재판부는 이 기록들의 중복 가능성을 검토한 후에도 최소 15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② 목격자 증언 및 자료

    • 존 라베(John Rabe)의 일기: 당시 난징 안전구역 위원장이었던 독일인 존 라베와 미국인 선교사들이 기록한 일기와 보고서.

    • 일본군 측 자료: 일본군 제16사단 등 당시 난징 점령에 참여했던 부대들의 진중일기(전투 일지)와 포로 처형 기록.



    3. 다른 재판(난징 전범 재판)과의 차이

    참고로, 도쿄재판과는 별개로 중국 현지에서 열린 **"난징 전범 재판(1947)"**에서는 더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 30만 명 이상이라는 수치가 제시되었습니다.

    • 도쿄재판(국제): 보수적으로 추산하여 20만 명 이상으로 확정.

    • 난징재판(중국): 확인된 매장 기록과 생존자 조사를 합산하여 30만 명 이상으로 확정.


    ------------------------------------------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가 벌인 이 참혹한 "100인 참수 경쟁"은 당시 일본의 유력 일간지였던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현 마이니치신문의 전신)에 아주 상세하게 보도되었습니다.



    1. 핵심 소스: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


    당시 신문은 이들의 살인 시합을 총 4차례에 걸쳐 연재하듯 보도했습니다.


    • 1차 보도 (1937년 11월 30일): "백인 참수 "레코드" 달성"이라는 제목으로 두 소위가 난징으로 향하는 도중 참수 시합을 시작했다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 최종 보도 (1937년 12월 13일): **"백인 참수 "초기록(超記録)""**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입니다.

      • 내용: 난징 입성 직전, 무카이는 106명, 노다는 105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먼저 100명을 넘었는지 알 수 없어, 두 소위는 "그럼 150명 베기로 다시 시합하자"며 웃으며 합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사진: 두 소위가 일본도를 짚고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현재 난징 대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 사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제2의 소스: 전후 재판 기록 및 본인 진술


    이 기사는 단순히 신문사의 과장이 아니었음이 전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 노다 츠요시의 자백: 전쟁 중 고향으로 돌아간 노다 소위는 초등학교 강연 등에서 **"실제로 내가 베어보니 100명은커녕 별로 죽이지도 못했다. 대부분 투항한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이 시합이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음을 본인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 난징 전범 재판 (1947년): 전후 두 사람은 이 신문 기사를 근거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재판에서 "신문사가 멋대로 지어낸 기사"라고 변명했지만, 당시 기사를 썼던 종군 기자들의 증언과 기사의 구체성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TOTAL: 2777125

番号 タイトル ライター 参照 推薦
3/31(水) パッチ内容案内させていただ… 관리자 2023-03-24 355882 19
2777065 韓国の造船業を奪うトランプ。 (2) adslgd 01-17 137 0
2777064 韓国人は 1位できなければ絶対寝るこ....... (4) 스토롱맨 01-17 90 0
2777063 日本はどうして劣等ですか? huh? w (1) shinjohhyeopryeo 01-17 105 0
2777062 イタリア総理韓国訪問に (1) 스토롱맨 01-17 104 0
2777061 中国は絶対的にアメリカ軍事力に負....... 스토롱맨 01-17 79 0
2777060 エクアドル. 昼に強盗, 映像 (1) avenger 01-17 93 0
2777059 速報)イタリアメラニー総理 “韓国の....... 신사동중국인 01-17 126 0
2777058 中国はアメリカ軍事力より韓国軍事....... 스토롱맨 01-17 82 0
2777057 中国は統計で悟ったようだ (2) 스토롱맨 01-17 93 0
2777056 日本でiPhoneが人気な理由 (5) ef58 01-17 144 1
2777055 일본의 난징 대학살 ddd_1 01-17 83 0
2777054 世界中が韓国を好むようだ. propertyOfJapan 01-17 100 0
2777053 韓国が最高で人気が多い理由 (1) 스토롱맨 01-17 95 0
2777052 朝鮮のおもしろい冗談。 (4) adslgd 01-17 145 1
2777051 日本を嫌うの韓国だけでしょ? (1) JAPAV57 01-17 123 0
2777050 youtube グローバル人気 MVを見れば実感....... (1) bibimbap 01-17 93 0
2777049 ドイツ家族が本物の和食居酒屋に感....... (1) JAPAV57 01-17 90 1
2777048 韓国が動けば中国では非常 (1) 스토롱맨 01-17 61 0
2777047 韓国が優れるのはキムチとスマート....... (12) ef58 01-17 139 3
2777046 韓国に無い高品質女性ギタリスト JAPAV57 01-17 85 1